277 네트워크와 리포트

<오사카 통신>을 닫으며.

2018년 4월 부임 이래 3년여 동안 운영해오던 <오사카 통신>의 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 귀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어서, 잡무 정리 외에 총영사로서 발신할 공적인 내용도 이젠 거의 없다.

재임 기간을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이 있었지만, 일일히 기억을 소환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그동안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일해왔는지는 남기고 싶다. 생각해 보니, 지난해 10월 출간한 <총영사 일기>의 머릿말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 글로 <오사카 통신>의 폐간사를 대신한다. 원래 한글로 먼저 작성한 뒤 일본어로 번역해 책에 실은 것인데, 여기에 한글본과 일본어본을 모두 올린다.

그동안 나의 미미한 글을 읽고 격려해준 한-일의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는 ‘주오사카대한민국 총영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약 32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의무를 마친 뒤 들어간 첫 직장이 신문사였고, 신문사를 그만둔 뒤 다른 정규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오사카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니 나에게 신문기자는 첫 직업, 총영사는 둘째 직업인 셈이다.

저널리스트에서 공관장(대사 또는 총영사)으로 직접 전직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문기자가 정부의 관료에 발탁되어 일한 뒤 공관장이 된 경우는 있지만, 나처럼 바로 공관장이 된 사례는 없는 것 같다.

저널리스트와 공관장은 어떤 면에서 일의 방향성이 역이다.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정부의 밖에서 정부가 하는 일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인 데 비해, 공관장은 정부의 정책이나 방침을 주재국 정부나 국민에게 전파하고 설명하는 일을 주로 한다. 저널리스트가 ‘정부 밖의 감시자’라면 공관장은 ‘정부 안의 행위자’라고 할 수 있으니 변신의 폭이 작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2017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위원장으로 일한 전력도 있다.

이런 특이한 배경과 경력 때문인지, 나의 오사카 총영사 임명에 관해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기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낙하산 인사’라는 시각이 있었는가 하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태스크포스의 위원장을 맡은 경력이 한일관계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이런 지적이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오히려 이런 지적이 내가 총영사로서 해야 할 일을 더욱 선명하게 제시해주고, 더욱 열심히 업무를 하도록 분발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낙하산 공관장’, ‘반일 공관장’의 이미지를 탈피하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30여 년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쌓은 경험과 식견을 활용해, 주재국 시민과 동포들에게 진실하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자문자답했다. 이 책의 재료가 된 글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산물의 하나이다.

외교관 일을 하면서, 외교관과 기자가 하는 일이 다른 것 같지만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외교관은 주재국의 인사를 만나면서 중요한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다. 영어로 말하면 ‘네트워크’ (network)와 ‘리포트’ (report)가 주요 업무이다. 기자도 사람을 만나 취재를 하고 그 결과를 기사로 보고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네트워크와 리포트라는 점에서 일의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다만, 외교관이 동료 외교관이나 상사를 대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기자는 일반 독자를 상대로 기사를 쓴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외교는 외교관들끼리만 하는 ‘그들만의 리그’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외교 분야에도 시민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시민을 주체 또는 대상으로 하는 공공외교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요즘은 시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외교관만의 폐쇄적인 외교교섭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민의 대다수의 관심사인 사안일 경우가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의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이다.

최근 한국정부가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특히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공외교에 힘쓰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공관이 하는 외교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관이 하는 일을 주재국 국민과 동포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리고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외교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으로 2018년 4월17일 오사카에 부임한 뒤부터 바로 총영사로서 하는 활동 가운데 공개해도 되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오사카 통신>이란 이름으로 투고하기 시작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외교가 아무리 중시되는 시대라고 하지만, 외교 활동 중에는 아직 밖으로 공개하지 못하는 일과 행사도 많이 존재한다. 그래도 공개와 비공개의 경계를 잘 구분해서 될 수 있으면 공개의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일반적으로 외교관이 외교활동에 대해 직접 공개 투고하는 것은 드물고 낮선 일이겠지만, 기자 출신인 나에겐 잘할 수 있고 익숙한 일이다. 더욱이 ‘외교관 순혈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민간인을 공관장에 기용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하이브리드(잡종) 인사정책에도 이런 활동을 통해 조금은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사카, 교토를 비롯한 간사이지역은 고대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지금도 인적 교류가 가장 활발하고,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밀집해 사는 곳이라는 3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전역에서 한일 우호와 협력의 잠재력이 가장 큰 ‘공공외교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정부 사이의 공식적인 관계가 나쁘더라도, 아니 나쁠수록 간사이지역이 지니고 있는 이런 자산을 활용해 ‘간사이지역이 주도하는 한일우호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간사이지역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나라와 나라의 갈등이 조금이라고 완화되길 바랐다. 재임하는 동안 일본의 지자체, 경제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의 인사들과 폭넓게 만나 깊게 듣고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민단을 비롯한 다양한 동포 단체 및 동포들과도 함께 행사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기쁨과 어려움, 고민을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내가 부임한 이래 2020년 7월 말까지 각종 활동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일기처럼 기록한 글을 모은 것이다. 신문기자 출신의 초보 총영사가 관할지역(오사카부, 교토부, 시가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을 무대를 발로 뛰면서 기록한 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듯하다. 외교 일정이 연례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주제가 겹치고 내용이 중복된 경우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의 생각의 변화와 확장을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대로 두었다.

총영사 재임 중에 책을 출판하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7월 말까지로 끊어 원고를 마감했다. 하지만 앞으로 재임하는 기간까지는 중단 없이 투고를 계속할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공관장의 임기가 3년 정도이므로 2021년 상반기까지는 페이스북이나 블로그(https//:ohtak.com)에서 글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닌데 출판까지 오게 된 데는, 투고 초기부터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블로그까지 만들고 손수 일본어 번역까지 하면서 글을 차곡차곡 쌓아준, 도쿄특파원 시절 때부터의 지인 오구리 아키라 형의 힘(본문 65 참조)이 절대적이었다. 이 책의 일본어 번역은 극히 일부의 용어 및 문장 수정과 제목의 변경, 외에는 전적으로 그의 힘에 의존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전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하사바 기요시 형과 저술가 가와세 슌지 씨는 관할지인 오사카지역의 동방출판사에서의 출판을 주선해주었다. 출판 과정에서 원고와 사진을 자기 일처럼 꼼꼼하게 정리하고 살펴준 비서실의 김진실, 장정훈 비서, 그리고 동방출판사의 기타가와 편집자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또 항상 곁에서 ‘가차 없는 야당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처 정현진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어려운 한일관계 속에서도 두 나라 시민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한국과 재일동포 사회, 그리고 동포 개인 개인의 거리를 좁혀주는 접착제나 촉매제, 위안제가 되길 바란다.

2020년 8월 말일, 도지마강이 바라다 보이는 관저에서


私は、「駐大阪大韓民国総領事」として任命されるまで、約32年間新聞記者として働いてきました。大学を卒業し兵役を終えてから、初めての職場が新聞社で、新聞社を辞めてから他の職は挟まず、大阪総領事として任命されました。ですから私にとって新聞記者は最初の職業、総領事は二番目の職業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ジャーナリストが、いきなり公館長(大使/総領事)へと転職することは、世界どの国においても稀な事例だと思います。韓国で新聞記者が政府官僚として勤めた後に公館長として任命されたケースはありますが、私のように記者から直接公館長に起用された例は、今のところないのではと認識しています。

ジャーナリストと公館長は、ある意味仕事の方向性が反対であると言えます。ジャーナリストの役割が、外部から政府を監視し、批判することである一方、公館長は政府の政策や方針を駐在国の政府や国民に伝え、説明することが主な任務となります。ジャーナリストが「政府外部からの監視者」だとするならば、公館長は「政府内部における行為者」ですから、置かれた立場の乖離が決して小さくはないでしょう。それに加え、私は2017年7月から5カ月間、「韓・日日本軍慰安婦被害者問題合意検討タスクフォース」の委員長を務めた経歴もあります。

このような珍しい背景や経歴ゆえなのか、私の大阪総領事任命に関し、韓国と日本両方から多くの関心が集まりました。「外交経験を持たない記者出身」という点から「天下り人事」という視線があったかと思えば、「2015年韓・日日本軍慰安婦合意」を批判的に検討したタスクフォースで委員長を務めた経歴が、韓日関係に負担になるという憂慮もありました。このような指摘が全面的に正しいとは言えないものの、世論としては十分にあり得る反応だったと思います。 今振り返ってみると、このような指摘のおかげで、私は自らが総領事としてするべきことがより鮮明になりましたし、また業務に対し、より一層励む刺激剤と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天下り公館長」、「反日公館長」というイメージを払拭させ、言葉ではなく行動によって成果を表すためには何をどうすれば良いだろうか。30年余りのジャーナリスト経験に基づいた識見を活かし、駐在国の市民及び同胞に対し、真心を以て歩み寄るのが最も望ましい方法ではないだろうかと自問自答しました。この本の材料となったFacebookの記事も、そのような過程において生まれた産物の一つです。

外交官として働きながら、外交官と記者の仕事は一見異なるように見えるものの、意外と似ているところが多いことに気づきました。外交官は、駐在国の要人と面会する中で、特に重要な内容は本国に報告をします。英語で言うと‘network&report’が主な業務です。記者も人に会って取材をし、その結果を記事として報告することが主な仕事です。

‘network&report’という点で業務内容が類似しています。ただ、外交官は同僚や上司を対象に報告書を作成するのに対し、記者は一般の読者を対象に記事を書くという点が異なるだけです。

しかし、世の中は今変わってきています。外交官達による、昔ながらの「内輪の外交」の時代は過ぎ去りつつあります。民主主義の発展と共に外交分野でも市民の声が反映されるようになり、市民を主体・対象とする公共外交(public diplomacy)の重要性は増しています。最近は市民の声が反映されていない外交官だけの閉鎖的な外交交渉は失敗する場合が多い傾向にあります。それが特に国民の大多数が関心を寄せている事柄の場合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代表的な事例が「2015年の韓・日日本軍慰安婦合意」です。

最近、韓国政府が公共外交(public diplomacy)の重要性を強調しており、中でも特に自国民を対象とした公共外交に力を注いでいるのも、このような変化を反映していることだと言えるでしょう。公館の外交活動にはいろいろあると思いますが、私は公館の行うことを駐在国の国民や同胞に、できるだけ広く周知し、共有することが、非常に重要かつ効果的な外交だと思います。

このような考えから、2018年4月17日、大阪赴任後すぐに、総領事の活動の中で公開しても大丈夫な内容を取り上げ、『大阪通信』というタイトルでFacebookに投稿し始めました。

市民と共にする外交が重要視される時代とは言え、外交活動の中には、公にできない仕事や行事も多く存在します。それでも公開と非公開との境界線をうまく区別し、できる限り公開可能な領域を広げる努力はしてきたと自負します。

一般的に、外交官が外交活動に関して直接公開・投稿することは珍しいですが、記者出身の私には慣れていることで、得意分野でもあります。同時に、私のこのような活動は、「外交官純血主義」の弱点を補う目的として民間人を公館長に起用しようとする文在寅政府のハイブリッド人事政策にも、肯定的に貢献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

大阪、京都を含む関西一帯は、古代から韓半島との交流が一番先に始まり、現在も人的交流が最も活発に行われ、日本の中で在日同胞が最も密集して暮らしている場所という3つの特徴を備えてます。このような点から、日本全国の中でも韓日友好及び協力に関する潜在力を最も秘めている「公共外交の宝庫」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私は政府間の仲が悪かったとしても、いやむしろ悪い時であるほど、関西の持つ魅力を活かし、「関西が導く韓日友好関係」を築き上げ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ました。関西の活発な交流と協力を通して、国同士の葛藤が少しでも緩和されることを願いました。在任中、日本の地方自治体、経済界、学術分野、マスコミ、文化界の関係者など、幅広い要人の方々にお会いし、密度の濃い意見交換をするために努力しました。民団をはじめ、様々な同胞団体及び同胞達と一緒に行事や食事を共にしながら、喜びや悩み、苦悩に寄り添う努力をしました。

この本は私が赴任して以降、2020年7月末まで各種活動をしながら、見て、感じて、話して、考えたことを日記のように記録したものを綴ったものです。新聞記者出身の新米総領事が、管轄地域(大阪府、京都府、滋賀県、奈良県、和歌山県)を舞台に足を運んで記録した報告書という表現が一番しっくりくると言いましょうか。外交日程は毎年定例的に繰り返されることが多いため、テーマが重なったり、内容が重複する場合も多いですが、時間の流れによる私の考えの変化や知見の広がり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の思いから、そのままにすることにしました。

総領事在任中に本を出版することに対して負担はありましたが、逆にだからこそ意味があるのではという周りの勧めもあり、7月末をもって原稿を締め切りました。しかし、今後も在任中は中断することなく投稿を続けるつもりです。一般的に公館長の任期は3年程ですので、2021年上旬ごろまではFacebookやブログ(https//:ohtak.com/)を通して、皆様にお会い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います。

元々出版を意識して書きはじめた文ではありませんが、今回出版まで至ったのは、東京特派員時代からの友人であり、兄貴分の小栗章さん(本文No.65参照)の力が絶対的でした。彼は、私から特に依頼したわけでもないにも関わらず、私が記事を投稿し始めた当初から、自らのご好意によってブログを開設し、日本語訳をし、着々と投稿文を蓄積してきてくださいました。この本の日本語訳はごく一部の用語や文章の修正、タイトルの変更以外は全て彼の力に頼ったものです。この場をお借りして、彼に感謝の意を伝えたいと思います。元朝日新聞ソウル特派員である波佐場清さんとライターである川瀬俊治さんは、管轄地域である大阪に位置する東方出版での出版を斡旋してくれました。また、出版過程で、原稿のチェックや写真データ整理を自分のことのように手伝ってくれた秘書室職員の金珍實さんと張正勳さん、東方出版編集者の北川幸さんにも感謝の意を伝えます。そして、いつもそばで「容赦のない野党」役を担ってくれている妻、鄭賢珍にも感謝を述べたいと思います。

最後に、この本が厳しい韓日関係の中でも、両国民の心と心をつなぐ接着剤になり、韓国と在日同胞社会、また同胞同士の距離を縮めてくれる触媒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

2020年8月末日、堂島川が見渡せる官邸で

참고로 이 책에 대한 정보를 담은 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https://www.hanmoto.com/bd/isbn/9784862494030

276 공익재단법인 오사카관광국의 미조하타 히로시 이사장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 감염 사태로 비행기 편수가 확 준 게 하나의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직 안의 인간인지라 조직의 확실한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5월 중순을 목표로 출국을 준비해왔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보름 정도 일정이 미뤄졌다.

5월11일에는 오사카관광국의 미조하타 히로시 이사장의 초대로 송별 점심을 했다. 오사카관광국이라고 하면, 오사카부 또는 시 안에 있는 관광 담당 부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오사카부와 시가 주도해 오사카지역의 관광진흥을 위해 2013년에 만든 공익재단법인이다. 제3섹터의 조직으로 보면 된다.

미조하타 이사장은 설립 당시의 오사카부 지사인 마쓰이 이치로 현 오사카시장과 하시모토 토오루 당시 오사카시장이 영입한 인물이다. 원래 자치성 관료 출신으로 2대 관광청 장관을 지냈다. 오이타 풋볼클럽 대표도 지내 황보관, 윤정환 등 한국의 축구선수 출신들과도 친하다. 미조하타 이사장은 90년대 초부터 한국에 다니기 시작해 이제까지 통산 99번 한국을 방문했다. 최적의 시점을 잡아 100번째 방문을 노렸으나, 한일관계 악화와 코로나 사태로 추후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한다. 기인 기질이 있는데, 한국의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

미조하타 이사장과는 그동안 한일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왔다. 4월 말에 열린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의 공중화장실 준공식 때도 바쁜 일정 속에서도 참석해 애국가 부르기를 곁들인 유쾌한 축사를 해주었다. 이날 점심 때도 앞으로 코리아타운을 우메다지역, 난바지역과 함께 오사카의 3대 명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100번째 방문 때는 나를 서울에서 만나 그 진척 상황을 말해주겠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배가 불렀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일어설 때 그가 줄 게 있으니 잠시 자기의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직원 수십명이 있는 사무실 앞 공간으로 데려가더니, 감사장과 꽃다발을 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깜짝 선물이었다. 감사장 내용은 재임 기간에 코리아타운을 명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한일교류와 우호증진에 힘쓴 것에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직원들에게 한마디 인사를 하라고 해, 정치관계는 어렵지만 한일교류의 깊은 역사와 인연이 있는 지역 특성을 살려 한일우호를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또 오늘의 깜짝 이벤트가 가장 의미 있는 귀국 선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75 귀국하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같이 하도록 노력하겠다

4월25일부터 5월11일까지 도쿄도, 오사카부, 교토부, 효고현에 세 번째 코로나 긴급사태선언이 발령되었다.

긴급사태선언 발령 첫날인 25일, 오후 2시부터 오사카시 텐노지에 있는 재일동포 사찰 통국사에서 ‘재일본 제주 4・3 73주년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이곳에 2018년 11월에 제주 4・3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진 뒤, ‘재일본 제주 4・3 희생자유족회’는 이곳에서 매년 위령제를 열고 있다.

지난해는 코로나 감염 사태로 미루다가 11월에, 온라인으로 위령제를 했다. 올해도 여전히 코로나 감염이 심각하지만, 대면과 비대면을 혼합한 방식으로 위령제를 거행했다. 현장에는 30여명만 참석하고, 공연은 모두 미리 제작한 영상을 온라인으로 발신했다. 추도사도 유족회장과 제주도민회장만 현장에서 낭독하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전했다.

나는 이 행사가 임기 중 사실상 마지막 행사이고 제주 출신이 유독 많은 오사카에서 4・3 위령제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의미를 생각해, 직접 참석해 시작부터 끝까지 2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되돌아 보니, 2018년 위령비 제막식을 포함해 이제까지 모두 4차례 통국사의 위령비 현장을 찾았다. 이곳의 위령비는 4・3과 관련해 해외에 세워진 유일한 비인데, 갈 때마다 오사카에서 4・3의 기억을 이어가는 상징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4・3의 관련자이기도 한 김시종 시인의 메시지, 소리꾼 안성민- 고수 조윤자의 창작 판소리 <4월 이야기> 공연, 재일코리안 풍물패 ‘한마음’의 풍물놀이가 비디오로 상영된 뒤, 마지막에 참가자들의 헌화로 행사가 끝났다.

그런데 폐회선언 뒤 갑자기 나한테 귀국 인사 겸 한마디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얼떨결에 앞에 나갔다. “김시종 시인이 영상 메시지에서 희생자, 희생이란 말에 어색함을 느낀다고 한 것은 이런 위령 행사로 마치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4・3이 일어난 배경과 역사를 생각하면서 더욱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귀국하더라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같이 하도록 노력하겠다.”

즉석 인사를 마친 뒤 위령비와 참석자들에게 작별 인사을 하고 행사장을 떠나려 하니, 약간 목이 메였다.

274 코리아타운을 한일우호의 발신지로 만드는 데 함께 힘을 모아나가자

오사카시 이쿠노구는 일본 안에서 재일동포들이 가장 밀집해 사는 곳이다. 통계를 보면, 이쿠노구 전체 인구 12만9천여명(2021년 3울 기준) 가운데 한국 또는 조선적(무국적)의 동포가 2만766명(2020년 9월 기준)이라고 한다. 귀화한 동포까지 포함하면, 한국 뿌리의 동포는 훨씬 많다.

이쿠노구에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상점가가 있다. 6백미터의 거리 양편에 김치를 비롯한 한국식품과 화장품, 케이팝과 관련한 상품을 파는 가게 백 수십 개가 줄지어 있다.

최근 한일 사이에 정치갈등이 심해지고, 코로나 감염이 기승을 부려도 코리아타운은 전혀 바람을 타지 않았다. 오사카의 내로라하는 상점가들이 외국 손님이 끊어지는 바람에 파리를 날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곳은 ‘제4차 한류붐’을 타고 더욱 많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양국의 정치 갈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한일 민간교류의 새 경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곳에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을 가장 긴급한 시설로 꼽았다.

드디어 4월23일, 코리아타운의 미유키모리 제2공원에서 공중화장실 준공식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공사를 시작한 것이 이날 완공되어 식을 하게 되었다. 이 화장실 사업은 한국정부가 건설비를 대고, 오사카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관리와 운영을 민단과 상점회가 맡는 ‘삼위일체’ 방식으로 이뤄졌다. 앞으로 한일 사이의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을 하는 데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날 준공식에는 상점회 관계자, 주민, 민단 간부, 오사카관광국 미조하타 히로시 이사장 등 일본 쪽 관계자 등 70여명이 참가했다. 나는 축사에서 “화장실의 준공으로 화장실 건설의 측면에서는 끝일 줄 모르지만, 한일우호의 발신지로서 코리아타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겨우 첫걸음을 뗐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번의 경험을 살려 코리아타운을 한일우호의 발신지로 만드는 데 모두 함께 힘을 모아나가자”고 말했다. 이어 “내가 총영사로 재임 중에 화장실 건설을 시작해 완공까지 하게 된 것을 귀국 직전의 더없는 선물로 생각한다”고 감상을 밝혔다.

오사카에 이쿠노구가 동포 밀집지라면, 고베에는 나가타구가 그렇다. 한때는 1만명 이상의 동포가 살았는데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이후 수가 줄기 시작해, 지금은 구 전체 인구 9만여명 중 4천여명의 동포가 있다고 한다. 코리아타운 화장실 준공 전날인 22일에는 나가타구에서 고베아사히병원을 운영하는 김수량 이사장의 초청으로 나가타구를 주마간산 식으로나마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곳에서 코리아교육문화센터를 하는 김신용씨의 안내로, 한신교육투쟁 기념비, 고베전철 조선인 노동자비, 재일동포가 많이 일했던 고무구두 공장가를 돌아봤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인상 깊은 견학이었다.

273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뉘앙스를 가진 ‘혐한’이라는 말은 없애자

오사카의 코로나 감염자 수가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런 탓에 사회적 공기는 무겁지만, 4월20일의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이날 시가현 나가하마시 다카쓰키쵸 아메노모리 마을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암’에 갔다. 정식 이름은 ‘동아시아 교류 하우스 아메노모리 호슈암’이다. 오사카총영사관에서 거리가 가장 먼 곳 중의 한 곳이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원래는 이곳의 히라이 미스오 관장과 히라이 시게히코 전 관장 등 관계자들과 송별 인사 겸 점심을 하기로 했으나 코로나 감염 확대로 식사는 취소했다. 대신, 그동안 한일 풀뿌리 교류에 힘써온 시게히코 전 관장에게 감사패를 전하는 것으로 만남을 조정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 가득한 환대를 해주었다.

시게히코 전 관장은 지난해 2월, 1년여 이상 걸쳐 손수 종이 찰흑으로 만든 조선통신사 행렬상을 총영사관에 기증한 바 있다. 내가 2018년 부임 인사차 방문했을 때 그곳에 전시된 행렬상을 보고 재건축하는 총영사관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만들어 준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는 일본의 학자이자 외교관이다. 주로 대마도에서 일을 하면서 조선과 외교를 담당했다. 조선통신사 방문 때도 2 차례 동행하는 등, 관여했다. 이런 그가 한일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5월 일본을 국빈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궁중만찬 연설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부터이다. 아메노모리 호슈암이 그의 탄생지인 시가현의 마을에 생긴 것은 그보다 앞선 1984년이다.

그의 성신의 외교관은 그의 저서인 <교린제성>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성신이란 서로 속이지 말고 싸우지 말고, 진실로써 사귀는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호슈암 관계자들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일관계의 부침과 관계없이 꾸준히 민간교류에 힘을 쏟고 있다. 나도 이들을 응원하자는 생각에 기회를 만들어 현지를 방문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이번이 4번째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2월에는 미카즈키 다이조 시가현 지사와 함께 이곳에서 한일교류와 관련한 시민 대담회를 한 바 있다. 이때 내가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한’은 몰라도 상대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는 뉘앙스를 가진 ‘혐한’이라는 말은 없애자”고 제안한 바 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미스오 관장이 다가와 “요즘 여기저기 기회가 있을때마다, 혐한이란 말을 없애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슬며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호슈암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시가현청에 들려 미카즈키 지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272 週刊金曜日 우에무라 발행인으로부터 귀한 ‘귀국 선물’

일본에 <슈칸 킨요비>(주간 금요일)라는 주간지가 있다. 1993년에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표방하면서 나온 진보적인 잡지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및 인터넷 시대의 종이 매체 퇴조의 물결 속에서 경영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도 광고를 전혀 받지 않고 정기구독을 중심으로 꿋꿋하게 진보적인 논지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도쿄 특파원을 하던 때(2001-2004년), 이 잡지의 창간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자극을 받아 일본에서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일간지 창간을 준비했는데, 일간지 창간은 자금 등의 문제로 어려워 주간지를 창간하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나도 특파원 시절에 다른 나라 특파원 몇 명과 함께 이 주간지에 돌아가면서 칼럼을 쓴 인연이 있다.

지금 이 잡지의 발행인(사장)이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의 우에무라 다카시씨이다. 1991년 일본군위안부의 증언과 관련해 첫 보도를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일본 우익으로부터 상징적인 공격의 표적이 되어 큰 곤경을 겪고 있다. 그가 신문사를 퇴직하고 고베에 있는 대학에 교원으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우익의 집요한 공격으로 그마저 무산된 바 있다.

그가 이 잡지에 ‘우에무라 다카시 평사장이 간다’라는 권말 칼럼을 쓰고 있는데, 4월16일자 발행 잡지에 나의 책(<총영사일기-간사이에서 깊어지는 한일교류>)과 관련한 글을 썼다.

귀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런지, 귀한 ‘귀국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링크는 그의 칼럼을 총영사관에서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271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상가회, 우키시마마루 순난자 추도회, 등등

4월17일, 내가 오사카총영사로 부임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돌아갈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14일에는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상가회 관계자들을 만나, 점심을 같이했다. 코리아타운은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지켜봤던 곳이다. 재일동포의 삶과 한일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가 집약되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만나 코리아타운이 건설적인 한일 우호의 상징지로 발전하도록 힘써주길 당부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산에 올랐으면 내려가야 하는 게 이치이다. 요즘 오사카의 코로나 감염이 심각도를 더해가고 있어 걱정이지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하루 하루, 하나 하나 질서정연하게 원점으로 회귀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주부터 민간교류, 풀뿌리교류, 문화교류에 힘쓴 관계자들을 찾아보고 있다.

15일에는 승용차로 2시간 거리인 마이즈로로 가서, 우키시마마루 순난자 추도회 회장인 요에 카즈히코씨를 만났다. 마이즈루 시민 주도로 매년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도회를 주최하고 있는 주역이다. 그는 중학교 미술 교사 출신으로, 1978년 사고 해역 근처에 세워진 순난비를 직접 제작했다. 바닷가여서 소금에 부식되지 않게 강화프라스틱(에프알피)으로 만들었는데, 만들면서 몇 번이나 시너 중독이 될 뻔했다고 한다.

올해 80살인데도 추도회뿐 아니라 현지에서 한국역사와 문화를 정력적으로 알리고 있다. 같이 점심을 하고, 사무실을 겸한 자택을 방문해 여러 활동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집에는 손수 만든 한국의 탈과 장승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행사 때 인사만 하고 헤어졌었는데, 한일교류 활동과 관련한 깊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6일에는 1963년 이래 교토 민단 건물에 들어 있다가, 58년 만에 독립 사무실을 얻어 이전한 교토한국교육원 이전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토에 갔다. 교토에 간 김에 사재를 털어 구입한 한국의 미술품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고려박물관을 들렸다. 박물관을 만든 아버지 정조문씨의 뜻을 이어, 아들 정희두 관장이 어려움 속에서도 공을 들여 운영을 하고 있다. 1년에 2번씩 전시물을 바꾸고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 불화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교육원 이전식에 가는 길에 코무덤(이총)에도 잠시 들려 인사를 했다.

12일에는 1995년 윤동주 시비를 도시샤대학 안에 처음 세움으로써 일본 안의 윤동주 추모 분위기를 한 단계 끌어올린 주역인 윤동주추모회와 도시샤 코리아동창회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다. 대신 전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지금 한일관계가 어렵지만, 이렇게 여기저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류와 우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마음이 든든하다. 이들의 노력이 더욱 큰 꽃을 피우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270 ‘아스카의 바람, 나라를 만들다’ 고대 유적 답사 행사

올해는 정말 다른 해에 비해 벚꽃 개화가 빨랐던 것 같다. 벌써 벚꽃이 다 떨어지고 초록 잎새가 싹트고 있다. 4월7일에는 나라에서 문화행사가 열려서 갔는데, 나라 시내도 역시 벚꽃이 지고 있었다.

이날, 나라교육원이 올해부터 의욕적으로 시작하는 ‘아스카의 바람, 나라를 만들다’라는, 나라지역 한일 교류 고대 유적 답사 행사 첫 회가 열렸다. 고대시대부터 신라, 백제 등과 활발하게 교류한 중심지인 나라지역의 한일교류 유적을 답사하면서 양국 교류사를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설적인 한일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자는 취지로 기획한 행사이다.

이날부터 연말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오전에 신라, 백제와 일본의 교류사를 공부하고 오후에 유적 답사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첫 행사는 코로나 상황도 감안해 버스 한 대에 타고 이동할 정도로 인원을 제한해 실시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어 채택 일본고교, 대학교, 교육원 등에서 한국문화와 한글을 가르치는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했다. 나도 공부도 하고 행사에 힘도 실어줄 겸해서 오전 강의부터 저녁 뒤풀이까지 하루종일 자리를 함께 했다.

오전에는 삼국사기를 전공한 오카야마 젠이치로 전 텐리대 교수의 야마토 정권과 신라의 교류에 대한 열띤 강의를 들었다. 워낙 의욕적으로 많이 강의자료를 준비한 탓에 강의는 오후 버스 안까지 이어졌다. 오전 강의가 끝난 뒤에는 버스를 타고 나라 시내에 있는 헤이죠궁터 복원지(견당사선, 주작문, 태극전, 자료관 등)을 둘러본 뒤 가시하라시로 이동해 일본 초대 진무 천황의 산릉을 답사했다.

마지막에는 나라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와카쿠사산에 올라가 지형지세를 보며, ‘왜 야마토 정권이 나라에 자리잡게 됐는지’에 관해 오카야마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나라평야(야마토평야)가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바닷길을 통한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고 물산도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오카야마 교수는 설명했다. 산 위에서 지형지세를 보면서 얘기를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오전 강의 전의 인사말에서 “고대시대의 한일 우호와 교류의 흔적을 직접 보고 배우면서 더욱 넓은 시야, 더욱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한일 양국관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더욱 자신있게 미래의 우호협력을 위해 나아갈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앞으로 일본에 체류할 날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 한일교류에 힘쓰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269 두껍고 깊어진 한일 양국 시민 교류

벚꽃의 만개와 함께 오사카의 3월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나의 오사카 생활도 부임 ‘만 3년’이 다가오면서 결산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인 27일은 좀 바빴다. 우선 고시엔 구장에서 오전 11시40분부터 열린 교토국제고와 도카이다이스가오고의 센바츠 제 2차전(16강전) 응원을 갔다. 첫 출전에 첫 승을 거두었기 때문인지, 동포들을 비롯해 더욱 많은 응원단이 왔다. 그러나 경기는 안타깝게도 9회말 굿바이 패배(4-5)로 끝났다.

거의 승리를 목전에 둔 경기였기에 아쉬움이 컸지만, 전교생 130여명에 불과한 초미니 학교가 거둔 기적임이 분명하다. 이런 쓰라린 경험이 앞으로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되길 기원하면서 운동장을 총총히 빠져나와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도인이자 사상가인 우치다 다쓰루 선생이 운영하는 합기도 도장 가이후관으로 갔다. 이날 오후 3시부터 가이후관을 중심으로 모이는 시민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 코로나 감염 사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강연은 대면과 비대면의 혼합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이후관에 직접 온 사람이 40명 정도, 웹으로 참석한 사람이 100명 정도라고 했다.

강연은 1부에 내가 오사카 총영사로 일하면서 느낀 점을 말한 뒤, 2부 우치다 선생과 대담, 3부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되었다. 강연이 모두 끝난 뒤 우치다 선생의 집에서 일부 참석자들과 함께한 뒤풀이까지 포함하면 5시간여에 걸친 ‘마라톤 풀뿌리 교류’였다.

가이후관에 들어가자마자 참석자들 가운데 여성이 많은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강연을 하면서는 참석자들의 집중력과 한일 풀뿌리 교류에 관한 뜨거운 관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날 강연을 통해 한일 사이의 정치관계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와 우호는 이전 어느 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어졌다는 걸 생생하게 체감했다. 이렇게 두껍고 깊어진 한일 양국 시민 교류를 어떻게 나라 사이의 우호로까지 연결시켜 나갈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 한일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268 교토국제고 고시엔(選抜高校野球) 첫 출전에 첫 승리

3월24일, 역사적인 날이다. 한국계 민족학교로서, 봄 고시엔(센바츠)에 첫 출전한 교토국제고가 첫 경기에서 승리를 했다.

첫 출전에 첫 승의 위업을 이뤘다. 이로 인해 ‘동해 바다’로 시작하는 교토국제고의 한글 교가가 생중계를 통해, 두 번이나 일본 전국에 울려 퍼졌다. 한 번은 경기를 하는 두 학교의 교가가, 2회 초와 말 공격 전에 각기 소개된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는 이긴 학교의 교가만이 울려 퍼진다. 그것도 고시엔 경기장의 스크린에 한글 교가가 한글로 비추어졌다.

나는 이번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출전으로, 한글 교가가 불려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첫 승리까지 하고 또 한 번 교가가 울려 퍼졌다. 그것도 한글이 주로 나가고 일본어 번역이 보조로 붙은 채로.

이날 응원을 온 동포들은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정말 눈물이 나오네요.” 나도 감정이 무딘 사람이지만 승리를 한 뒤, 동포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경기는 매우 극적이었다. 1회에 2점을 내주더니, 7회 초에 일거에 3점을 내어 역전을 했다. 그러나 바로 7회 말에 동점을 허용했다. 이것이 9회 말까지 이어졌고, 10회 연장에 승리의 신이 교토국제고의 손을 들어줬다. 10회 초에 2점을 얻어 쉽게 이기는 듯했는데, 말에 위기 끝에 1점만 내주면서 5-4로 힘겨운 역전승을 거뒀다.

안타 수는 14-6으로 상대팀 미야기현의 시바타고가 앞섰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고나 할까. 아니 ‘역사의 간지’가 작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여튼 교토국제고는 이날 대단한 일을 해냈다. 나는 그것이 ‘동포들의 눈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교토국제고는 27일 오전 11시40분 지난해 도쿄지역 추계대회 우승팀 도카이다이스가오고교와 2차전(8강 진출전)을 치른다. 나는 또 응원을 갈 예정이다. 이들이 벌이는 역사에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

267 한일관계와 저널리즘의 역할을 주제로 한 심포지움

올해 일본의 벚꽃 개화가 관측 사상 가장 이른 곳이 몇 곳 있다고 한다. 도쿄는 3월14일 개화했다고 기상청이 발표했는데, 평년보다 2주 정도 이른 것이라고 한다.

벚꽃이 핀 뒤에도 간혹 추위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벚꽃 개화는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전령사로 보면 될 것 같다. 19일 간사이 지역의 날씨도 완연히 봄 냄새를 풍겼다.

이날은 오전 일찍부터 저녁 때까지 교토에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와 총영사관도 들리지 않고, 교토의 리츠메이칸대 기누가사캠퍼스로 갔다. 기누가사캠퍼스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금각사와 료안지와 아주 가까이 있다.

이날 기누가사캠퍼스에서 오사카총영사관과 이 대학의 동아시아평화협력센터 공동 주최로, <한일관계와 저널리즘의 역할>을 주제로 한 심포지움이 열렸다. 아직 코로나 감염 사태의 와중이기 때문에, 대면과 비대면을 섞어 행사를 했다. 대면으로는 발제자와 토론자를 포함해 50여명, 온라인으로 250명 정도가 참석했다. 이 정도 규모이면, 엄청난 참여 열기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주제가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심포지움을 기획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관계에 미디어의 책임이 상당하다는 것, 둘은 그래도 양국관계에 미디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발표자와 토론자에는 전현직의 서울특파원과 도쿄특파원, 양국의 미디어, 역사, 사회학자들이 두루 참석했다. 서울과 홋카이도 등에서도 몇 사람이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온라인으로 참석할 수 있어 발표자와 토론자를 아주 쟁쟁한 인물들 꾸릴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코로나 감염 사태가 꼭 나쁜 것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심포지움은 제1부 한일보도의 메카니즘, 제2부 한일보도와 전문가 프레임, 제3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1부는 전현직 특파원들이 보도 현장의 문제를 보고 했고, 2부는 양국의 학자가 발표를 했다.

긴 시간 동안에 워낙 다양한 의견이 나와, 한마디로 이거다 하고 종합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보도 현장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나한테는 양국의 수뇌가 상대방 특파원을 직접 상대로 한 정보 발신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정보 발신자가 미디어의 중계없이 직접 독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와 한일관계의 악화가 배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전통 미디어의 힘은 아직도 강하다. 인터넷과 에스앤에스의 발신자들이 전통 미디어의 기사 내용을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일관계에서는 이런 경향이 훨씬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한국의 피해자, 일본의 가해자’라는 국경을 중심으로 한 틀을 넘어, 양국에 있는 피해자 사이의 연대와 공감을 끌어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였다. 앞으로 양국의 미디어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직막 폐회 인사말에서, 한일관계에서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 이런 모임이 유익했다는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번 심포지움이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 열린 뒷풀이 식사 때도 참석자들이 비슷한 평가를 했다.

266 한일학생 대화: ‘혐한’과 ‘반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3월11일, 동일본에서 대형 지진과 해일, 원전 참사가 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는 몇 일 전부터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참사의 후유증을 크게 보도하고 있는 중이다. 당시 참사가 일본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 매스컴의 보도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오후 시가현 오쓰시 시가현 공관에서
<‘혐한’과 ‘반일’을 학생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주제로 한, 한일학생 대화 행사가 열렸다. 지난해 2월14일 나가하마시 아메노모리 호슈암에서 열렸던 한일 교류 좌담회에 이은 후속 행사이다.

당시 좌담회에서, 내가 한일 사이에는 ‘반일’ 과 ‘혐한’이라는 말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특히 ‘혐’이라는 단어는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서로 노력해 없앴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이를 당시 같이 좌담에 참석했던 미카즈키 타이조 지사가 이어받는 형식으로, 이날 한일 대학생 대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1년 전에는 대학생뿐 아니라 각계에서 활약하는 성인들도 참석했지만, 이날은 대화 참석자 전원이 학생이란 점이 달랐다.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일본 학생 2명과 재일동포 학생 1명, 한국에서 시가현의 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학생 3명이 참석해 자신들의 경험을 곁들인 대화를 나눴다. 사회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시가현립대의 카와 카오루 교수가 맡았다.

1시간 30분 정도의 비교적 짧은 좌담회였지만, 카와 교수의 꼼꼼한 준비와 진행으로 알찬 내용의 대화가 이뤄졌다. 참석 학생들은 국적과 나이에 관계없이 지금의 한일관계에 대한 매스컴 보도와 여론이 실제 상황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던 때 한국에 유학했던 일본 학생들은 유학 중에 일본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하게 어려웠던 점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유학생들도 대체로 한국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비슷했지만, 일부 학생은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혐한성’ 행위를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거칠게 종합해보면, 한일 양쪽의 언론보도 등 여론이 실제 상황과 달리 나쁜 점을 과장해 강조하고 있고, 특히 일본에서는 나이에 따라 한국을 대하는 자세가 차이가 많이 난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직접 상대국을 가보거나 상대국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나와 미카즈키 지사를 포함한 대다수 참석자들은 이날 대화를 통해 양국관계가 어렵지만 상대방을 더욱 폭넓고 깊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 양국의 교류가 양에서 질로 발전할 필요성에 공감을 이뤘다고, 나는 느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날처럼 어렵고 힘든 주제라고 피하지 말고 꾸준히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1년 전 나의 문제제기를 잊지 않고, 코로나 감염의 어려운 속에서도 의미 깊은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준 미카즈키 지사의 마음 씀씀이와 행동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지난해부터 한글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윤동주의 시를 한글로 감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세상은 꼭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도 크게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